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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쉼, 思惟

청복(淸福)

 

                                                                                                                                                                                            - 지리산 천왕봉 가는길에

 

 필명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가 언젠가 읽은 책에서 청복(淸福)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그것으로 정하였다.

 청복이라 !

 어느 계곡물이 흐르는 푸른 숲 속 조그마한 바위에 걸터 앉아 흐르는 물소리 들으며

 숲이 품어내는 싱그러운 고유의 향내를 내 가슴 깊숙히 들이마시며  

 그대로의 나만을 위한 최고의 그 고상한 사치를 누리는 것. 그 순간만이라도 청복을 누렸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정하고 지속적인 청복을 누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단어의 추상성으로 인해 더욱 실현하기 어려운 것을 아닐까

 그래서 다산은 청복을 얻는 이는 세상에 얼마 없다고 했나보다.

 다만, 지금의 나로서는 청복을 누리기를 소망하는 마음만으로도 조금은 이 단어가 상징하는 의미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이 물댄 동산같고 물이 끊기지 아니하는 샘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사야서 58:11)

 

   

 청복에 대하여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는 다산 정약용의 글귀가 있는데 여기에 그 전문을 적어둔다

 

 

사람이 삶을 연장하고 수를 늘이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복의 즐거움을 수를 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이른바 복이란 대체로 두 가지가 있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관인(官印)을 허리에 두르고 풍악을 잡히고 미녀를 끼고 놀며,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초헌(軺軒 종2품 이상이 타던 수레)을 타고 비단옷을 입고, 대궐에 출입하고 묘당(廟堂)에 앉아서 사방의 정책을 듣는 것, 이것을 두고 ‘열복(熱福)’이라 하고, 깊은 산중에 살면서 삼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으며, 맑은 샘물에 가서 발을 씻고 노송(老松)에 기대어 시가(詩歌)를 읊으며, 당(堂) 위에는 이름난 거문고와 오래 묵은 석경(石磬 악기의 일종), 바둑 한 판[枰], 책 한 다락을 갖추어 두고, 당 앞에는 백학(白鶴) 한 쌍을 기르고 기이한 화초(花草)와 나무, 그리고 수명을 늘이고 기운을 돋구는 약초(藥草)들을 심으며, 때로는 산승(山僧)이나 선인(仙人)들과 서로 왕래하고 돌아다니며 즐겨서 세월이 오가는 것을 모르고 조야(朝野)의 치란(治亂)을 듣지 않는 것, 이것을 두고 ‘
청복(淸福)’이라 한다.
사람이 이 두 가지 중에 선택하는 것은 오직 각기 성품대로 하되, 하늘이 매우 아끼고 주려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청복(淸福)인 것이다. 그러므로 열복을 얻은 이는 세상에 흔하나 청복을 얻은 이는 얼마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불끈 일어나 팔을 걷어붙이고 여러 사람에게 큰소리치기를,

“열복과 청복 두 가지를 내가 장차 모두 얻어서 함께 누리겠다.”

하면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서 비웃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고, 하늘도 그 오만하고 망령됨을 미워하여 주지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여러 사람에게 큰소리치며 말하기를,

“나는 장차 내 일생을 3기(期)로 나누어, 전기에는 청복을 누리고, 중기에는 열복을 누리고, 말기에는 다시 청복을 누리겠다.”

하면 사람들은 더욱 물러나 도망치며 끝까지 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아니할 것이다.
전 병조 참판 오공(吳公)이 젊을 적에 단양(丹陽)을 찾아 굴혈(窟穴 은거하는 곳)로 삼고 일찍이 윤건(綸巾 비단으로 만든 두건. 은자(隱者)가 씀)과 우선(羽扇 새의 깃으로 만든 부채. 은자나 신선이 지님) 차림으로 검은 학(鶴)과 흰 사슴을 타고 운암(雲巖)과 사인암(舍人巖) 사이를 노닐다가 오공(吳公)이 일찍이 목학(木鶴)을 타고 사인암(舍人巖)에 내려왔으며, 집에 사슴 한 마리를 길들여서 출입할 때에 반드시 데리고 다녔다. 중년에 나가 벼슬하여 금화전(金華殿 궁중의 관서)에 오르고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 들어가며 내외(內外)의 직을 두루 거쳐서 지위가 아경(亞卿)에 이르렀다. 만년에 다시 단양(丹陽)으로 돌아가서 단약(丹藥)을 고며 초년에 일찍이 하던 일을 다 수행(修行)하여 지금 나이 71세인데, 그 화사한 얼굴, 흰머리를 바라보면 신선과도 같다.
아, 다 같은 백성인데 하늘이 어찌 공에게만
청복을 이처럼 후히 누리게 하는 것인가.
공과 같은 이는 세상에 나서고 물러나는 것이 회오리바람이나 번개처럼 언뜻번뜻하여 더듬어 찾을 수 없으므로, 그를 대하면 멍해져서 알고자 했던 것을 잃어버릴 정도이니 그 수명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하늘이 후하게 복을 내리는 것은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감히 이것으로 공의 수를 축하한다.

 

 

출처 : 다산시문집 13권  병조 참판(兵曹參判) 오공 대익(吳公大益)의 71세 향수를 축하하는 서 기미년(1799)에 지음

번역 출처 : 한국고전번역DB(http://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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